마신부님 생애.2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마신부님은 소규모 살레시오 인쇄소에서 일하는 안토니오 가보리신부와 함께 일하였는데, 그 일은 이탈리아의 후원자들에게 ‘먼 곳의 메아리’라 불리는 뉴스레타를 인쇄하여 보내는 일이었고(약1500부), 

그는 신문기사 쓰기, 편집, 인쇄, 배부, 등 온갖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들어온 수입은 몬시뇰 치맛띠 신부와 가보리 신부에 의해 새로 설립된 미야자키 자선여성단체에 의해 운영되는 고아원과 양로원에 보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가보리 신부와 ‘자선여성단체’가 돌봐주었던 모든 고아, 노인을 돕는 자선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으며, 더욱이 일본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일본당국의 감시가 뒤따랐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은인들의 성금일지라도 개인이 받을 수 없다는 당국의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가보리 신부는 실망하지 말고 일하자고 용기를 주었고, 미야자키 ‘자선여성단체’회원(훗날 가보리 신부는 이들과 함께 ‘까리따스 수녀회’를 창설한다)들과 함께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땅을 파고, 곡식을 심고, 송아지를 기르며 고아원과 양로원을 계속 보살피게 된다. 마신부는 이러한 가보리신부의 헌신적인 삶을 보고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1942년 사제로 서품된 마신부는, 도쿄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공부해 보라는 관구장 치맛띠신부의 청을 정중히 거절하면서 계속해서 가보리 신부를 돕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 청이 받아드려져 미야자키로 돌아와 고아원과 양로원 가족들을 보살피며 생활하게 되지만, 1944년 다시 관구장 신부의 부름을 받고 만주의 항구도시인 대련으로 들어가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하라는 명령을 받게된다.  

그는 주저 없이 순명하고 짐을 꾸려 1944년 8월 6일 일본 ‘모찌’ 항에서 부산행 연락선 「아사이 마루호」에 몸을 실었다. 선박편으로 한국에 도착한 마신부는 철도편으로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 평양을 걸쳐 만주까지 가게되는데, 그가 한국을 통과하면서 10년 후에는 지금 여행중인 이 나라에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 여생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 대련은 매우 번창하고있는 항구 도시였는데, 인구는 70여만을 돌파하고 있었고, 그중 약 40만이 중국인, 20만이 일본인 그리고 나머지는 주로 백러시아인(약 7만명)과 독일인, 한국인(약 7천명)들이 살고있었다고 한다. 대련은 몹시 이색적인 도시로써 가로수가 끝없이 늘어서 있고 질서 정연한 넓은 시가지와 현대적인 건물, 

그리고 대륙의 특유한 기질이 항구도시에 뒤섞여 강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백러시아인들은 거의가 공산혁명 때 망명한 러시아 귀족들이었고, 독일인들은 일본과 동맹국이라는 위치에서 매우 우대를 받고 있었다. 당시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던 나라는 일본이었으나 그 누구도 억압과 착취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처럼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곳에서 생활하려면 제일 큰 역할을 해주는 것이 언어였다.